[서양미술사] 20. 자연의 거울 (17세기: 네덜란드) (2024)

20. 자연의 거울 (17세기: 네덜란드)

- 오늘날 벨기에인 네덜란드의 남부지역은 당시 가톨릭으로 남아 있었고, 네덜란드의 북쪽 지방은 대부분 신교를 믿엇다. 신교도들은 영국의 청교도들과 흡사했다. 즉 경건하고 근면 절약하며 대부분 남쪽 지역의 호사스러운 허식을 싫어하였다.

- 17세기 네덜란드의 시민들은 바로크 양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건축에 있어서도 수수하고 절제된 양식을 선호했다. 그들은 대규모 시청사를 지으면서 당당하지만 형태는 단순하고 장식도 별로 없는 건축 양식으로 지었다

<암스테르담의 궁전> 1648년. 야콥 반 캄펜 설계, 17세기 네덜란드의 시청

- 신교 사회에서 중요한 회화 영역은 초상화 그리기였다. 성공한 많은 상인들은 그들 자신의 모습을 후손들에게 남기고 싶어했으며, 시장이나 시의원으로 선출된 명사들은 그들의 직위를 나타내는 표지가 들어있는 초상화를 원했다.

- 네덜란드의 프란스 할스가 초창기에 그린 <성 조지 시민 군단 장교들의 연회>는 유쾌한 순간의 분위기와 생기가 잘 드러나있다. 그러면서도 12명의 구성원 개개인을을 너무나 실감나게 묘사하여 마치 우리가 그들을 만났었던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성 조지 시민 군단 장교들의 연회> 1616년. 프란스 할스

- <피터 반 덴 브루케 초상>을 보면 할스의 솜씨를 더욱 잘 살펴볼 수 있다. 할스 이전의 초상화들과 비교해보면 이 그림은 거의 스냅 사진처럼 보인다. 우리는 마치 이 피터 반 덴 브루케라는 17세기의 무역 상인을 실제로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 이전 시대의 초상화들은 생동감이 넘치고 사실적이긴 하지만 주문한 사람의 위엄과 귀족적인 혈통을 암시하기 위해 세심한 배려하여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할스의 초상화들은 어떤 특정한 순간에 '포착해서' 그의 화폭에 영원히 고정시켰다는 인상을 준다.

- 할스는 그의 모델들을 결코 지루하고 따분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을 몇 번 붓질해 헝클어진 머리카락이나 구겨진 소매의 모습을 빠르고 능숙하고 실감나게 묘사했다. 즉, 초상화의 주인공이 그들다운 동작과 분위기 속에서 우연하게 취하는 듯한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했다.

<피터 반 덴 브루케 초상> 1633년경. 프란스 할스

- 신교를 믿는 네덜란드 화가들은 중세나 르네상스의 대가들과 달리 그림을 먼저 그려놓고 나서 구매자를 찾아나서야 했다. 이제 미술가는 한 사람의 후원자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횡포한 주인, 즉 작품을 구매하는 대중을 상대해야 했다. 화가들 사이의 경쟁도 치열해서 별로 유명하지 않은 군소 화가들은 회화의 특수한 장르의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려야 했다.

- 16세기 북유럽에서 시작된 전문화의 경향이 17세기에 와서는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물고기를 전문으로 그리는 화가들은 젖은 비늘의 은빛 색조를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어느 다른 화가보다 뛰어났다. 또한 바다 풍경을 전문으로 그리는 화가들은 파도와 구름을 그리는데만 능숙한 것이 아니라 배와 그에 딸린 장비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도 뛰어났다.

<해풍에 흔들리는 네덜란드 군함과 수많은 범선> 1640-45년경, 지몬 데 블리헤르

- 네덜란드 화가들은 미술사상 최초로 하늘의 아름다운을 발견한 사람들이었다. 단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세계의 한 부분을 그렸을 뿐인데도 그것만으로도 영웅적인 이야기나 희극적인 테마를 다룬 그린만큼 만족스러울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점을 발견했던 최초의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얀 반 호이엔이다.

- 조용한 아름다움이 넘치는 회고적인 정경을 보여주는 클로드의 <아폴론에게 제물을 바치는 풍경>과 비교해보면 얀 반 호이엔의 <강변의 풍차>는 간결하고 솔직하다. 호이엔은 클로드처럼 고상하고 품위있는 신전 대신에 소박한 풍차를, 그리고 매혹적인 숲 속의 오솔길 대신에 별다른 특징 없는 자기 고햐으이 들판을 그렸다.

- 그는 우리들의 눈에 익은 모티프를 변화시켜서 우리들의 시선을 아득히 먼 곳으로 인도하며 마치 우리들이 제일 좋은 위치에 서서 저녁 햇살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강변의 풍차> 1642년. 얀 반 호이엔

- 네덜란드가 낳은 최고의 화가는 바로 렘브란트 반 레인이다. 그는 성공적이고 인기있는 화가였던 젊은 시절에서부터 파산의 비애와 진실로 위대한 인간으로서의 불굴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외로운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에 관한 놀라운 기록인 일련의 자화상들을 남겨놓았다.

- <자화상>은 만년의 렘브란트의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분명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지만 렘브란트는 그의 추한 모습을 결코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아주 성실하게 관찰했다. 여기에는 포즈를 취한 흔적도 없고 허영의 그림자도 없으며 다만 자신의 생김새를 샅샅이 훑어보고, 끊임없이 인간의 표정에 내포되어 있는 비밀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탐구하려는 화가의 꿰뚫어보는 응시가 있다.

<자화상> 1655-8년경, 렘브란트 반 레인

- <얀 지스크>의 초상화는 인물의 전생애를 다 보여주는 것 같다. 렘브란트의 위대한 초상화들에서는 실제 인물과 직접 대면하여 그 사람의 체온을 느끼고, 공감을 구하는 그의 절박함과 또한 그의 외로움과 고통을 느낄 수 있다. 렘브란트의 많은 자화상에서 볼수 있는 예리하고 침착한 눈은 인간의 마음 속을 곧바로 꿰뚫어보는 것 같다.

<얀 지크스> 1654년. 렘브란트 반 레인

- 신교도로서 렘브란트는 성경을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읽으며 성서의 정신 속에 깊숙이 들어가 그러한 이야기들이 벌어지는 상황이 어떠했으며 그런 순간에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처신했을지 머리 속에 그려보았을 것이다. <무자비한 하인의 이야기>는 성경 마태오 복음을 묘사한 소묘로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그림 자체가 설명이다. 분주한 회계사와 위엄있는 주인과 죄송스러워하는 하인의 상호 관계가 몇 개 안되는 선으로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무자비한 하인의 이야기> 1655년경. 렘브란트 반 레인

- <다윗 왕과 압살롬의 화해>는 으리으리한 옷차림을 한 왕자가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용서를 비는 자세나 그것을 조용하고 슬픈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다윗 왕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표현했다. 압살롬의 얼굴은 비록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다윗 왕과 압살롬의 화해> 1642년. 렘브란트 반 레인

- 렘브란트는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판화가로서도 역시 위대한 거장이었다. 그가 사용한 기술은 에칭(etching, 부식 동판화)이라는 기법이었다. <설교하는 그리스도>는 렘브란트의 에칭 작품 중의 하나로 그리스도가 설교를 하고 있고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기 위해서 그의 주위에 보여 있다.

- 렘브란트도 역시 카라바조와 같이 조화와 아름다움보다는 진실과 성실성을 더 중요시했다. 그리스도는 가난하고 배고프로 슬픈 사람들을 향해 설교하고 있다. 가난과 굶주림과 눈물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지만, 오른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여윈 늙은이는 지금까지 그려진 어떤 인물보다도 아름답다.

<설교하는 그리스도> 1652년경, 렘브란트 반 레인

- 네덜란드 화가들은 유쾌하고 소박한 방식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상을 묘사하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16세기 후반 브뢰헬의 전통을 이어받아 얀 스텐이 풍속화를 완성시켰다. 스텐은 그림만 가지고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여관을 경영하였다. 여관업은 그에게 흥청거리며 노는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그의 희극적인 인물 유형을 모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 <세례 잔치>는 평민들의 유쾌한 생활의 한 장면이다. 원화를 보면 누구나 작품의 화려한 색채들이 주는 따사로움과 부드러움을 쉽게 잊을 수 없다.

<세례잔치> 1664년. 얀 스텐

- 네덜란드의 '전문가'인 풍경화가로 야콥 반 로이스달을 들 수 있다. 그는 하를렘이라는 아름다운 도시에서 보내면서 '한 폭의 그림 같은 '숲의 풍경을 전문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로이스달은 검고 어두컴컴한 구름, 어두워져가는 저녁 햇살, 폐허가 된 성과 콸콸 흐르는 개울을 그리는 전문가가 되었다. 클로드 로랭이 이탈리아 풍경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화가였다면, 로이스달은 북유럽 풍경의 아름다움을 발견해낸 화가였다.

<나무로 둘러싸인 늪이 있는 풍경> 1665-70년, 야곱 반 로이스달

- 네덜란드의 회화 중에서 가장 '전문화'된 분야는 정물화였다. 정물화는 미술가 자신의 마음, 즉 그의 취향이나 기분을 반영하였다. 정물 그림에서 화가들은 그들이 그리고 싶은 물건을 자유롭게 선택해서 그들의 상상에 맞게 테이블 위해 배치할 수 있었다.

- 그림의 주제란 과거에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주기 시작했다. 사소한 말 몇 마디가 아름다운 노래의 가사가 되듯이 사소한 사물들로도 완벽한 그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17세기 화가들이 가시적인 세계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때 모색했던 것은 중요한 주제가 없이도 그림이 될 수 있다는 이 새로운 발견이었다.

<성 세바스티아누스 사수들의 조합의 뿔로 만든 술잔과 바다 가재 및 유리잔이 있는 정물>1653년경, 윌렘 칼프

- 베르메르 반 델프트의 작품 중에는 의미심장하고 거창한 주제를 다룬 것이 거의 없다. 대부분 전혀적인 네덜란드 가옥의 실내에 서 있는 순박한 인물들을 보여준다.

-그의 그림은 인물이 들어 있는 정물화이다. 단순하고 가식이 없는 그림이 불후의 명작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 규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원화를 본다면 그것이 일종의 기적과 같은 것이라는데 동의할 것이다.

- 그 기적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질감, 색채 및 형태들을 치밀하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베르메르의 표현 기법에서 비롯된다.

<부엌의 하녀> 1660년경, 얀 베르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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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Lidia Gr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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